개념있는 세상

유사한 배경을 가진다는것, 어린 시절을 공유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본인이 아직 사회의 때가 묻지 않았을 때의 기억을 공유하는 주변 인물들을 생각해보자. 학창시절 친구들이 주가 되겠지.
정말이지 희한하다.
내가 다소 엉뚱한 생각을 표현하거나 심지어 조금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되더라도, 적어도 그들에게는 이해받고 이미 용서받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인지 말로써 제대로 서술하기는 아무래도 어렵겠다.

잘은 모르겠지만 혹시, 여기 저기 다중의 가치들과 혼란속에 얼룩진 지금의 나보다는 그 때의 내가 “진짜 나"여서 그런 것은 아닐까.
그 때의 진짜 모습들을 서로 공유하고 기억하고 있는 사이라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더욱 신기한 것은, 내가 나로 온전히 존재할 수 있었던 그 시절에, 친하고 깊었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그다지 진득한 관계가 아니었던 친구나 지인과도 거의 비슷한 효과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너는 도대체 왜그러냐 이 x꺄"와 같은 말을 지금 내가 그들에게 한다고 해도, 딱히 기분 나빠하지 않을 것을 안다. 오히려 형언하기 어려운 자신의 본질 자체를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그들이 당장 나의 이런 생각이나 글에다 대고 “아주 그냥 ㅈㄹ을 하고 있네 이거..”와 같은 표현을 한다고 해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다. 아니,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미묘한 따뜻한 느낌마저 들지도 모르겠다.

나의 모자람일 수도 있다. 
얼음이 되었다가 강물이 되었다가 물총 속의 물도 되었다가 라면 끓이는 물도 되었다가.. 이런 태도라면 이것들은 모두 함께 H2O로서 공통된 본질을 일부는 공유할 수 있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 “그저 나는 얼음이오.”, “난 라면용 물일 뿐이오.”와 같은 자세로 살게된 까닭도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물론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런 변화가 어느 정도 있었겠지만.. 사실 그 사실은 매우 중요치는 않다.

인간 관계도 “화학적 결합"이 어느 정도 일어나야 하는 것 같다. 
“물리적 접촉"만이 주를 이루는 관계가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면, 마치 로또 추첨통 안의 공들처럼 수없이 팅팅팅 맞부딪치긴 해도 결국 너는 너고 나는 나로 끝나고 마는 것 아니겠나.

본질을 나눠본 지인, 친구만이 진실된 인맥이고 나머지는 쓸데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인생 초반인 이 나이에서, 앞으로의 인생은 새로 알게 되는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서로 화학적 교류를 하고 본질을 나누는 사귐을 할 수 있길 바라본다. 
그럼으로써, 위에 말한 정도의 상호 이해도를 갖기는 쉽지 않다고 하더라도, 편의점 냉장고 안의 “친한 듯하지만 실상은 서로 뻘줌하게 서있는” 그런 음료수 페트병들 같은 관계가 되지는 말자. 

내일(아니 오늘)은 공교롭게도 금요일이라, 더 말랑말랑한 마음으로 이 다짐을 실천할 수 있겠구나.


쿨쿨 자다가 갑자기 새벽에 문득 정신이 슬며시 깬 상태에서, 놓치고 싶지 않은 생각이 찾아와 굳이 글로 남긴다.
Back to sleep!

Posted by 태인배
“독서는 다양한 간접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값진 도구다.”와 같은 당연한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두꺼운 책을 품속에 품고다니며, 혹은 시도 때도 없이 어느 대학 교수의 논문을 발췌해 읊으며 “정보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 뇌속 데이터 축적을 뽐내는 누군가의 지적 허영도, 나에겐 “3개 묶음 14,900원"과 같은 판촉 안내문을 볼 때의 기계적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좋은 책은,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나에게’ 좋은 책은, “스케치북에는 양옥집을 고동색으로 그려야 한다. 문은 네모나게 그려야 한다.”와 같은 고정관념을 깨준다. 
독서는 초가집이나 유리집을 떠올려볼 수 있게 해준다. 물고기 모양의 집에도 사람이 살 수 있겠다고 믿게 한다. 집을 파란색 크레파스로 그려도 된다고 허락해준다. 그림 그리기(세상 살이)란 크레파스 3개로만 그려야 한다는 통념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심지어 더 많은 색의 크레파스가 있다는 엄청난 가설을 참으로 믿게 한다. “리빙 코랄"이나 “아쿠아 스카이"라는 색의 크레파스가 있다는 것도, 그 두개를 섞을 수도 있다는 것도 깨닫게 한다. 사실은 그 색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려 준다. 3개가 아니라 10개도 넘는 크레파스를 내 손에 쥐어주고 지긋이 기다려준다.
 
고동색의 세상과 작품들 속에서(사실이든 내 안경 색이든) 청록색, 귤색, 다홍색 등등의 크레파스로 무엇을 그리든, 네모 뿐만아니라 동그라미 ,세모, 별, 꽈배기 모양으로 어떻게 표현하든 여전히 나로서 온전히 존재할 수 있고, 좋은 작품으로 인정받아 더욱 빛나기까지 할 수 있다는 “증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확신”으로 날 이끌어준다. 
마치, 어머니가 날 사랑한다고 자주 말하지 않아도 언젠가부터 그것을 진리처럼 믿게된 것과 비슷한 것 같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것을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준다는 것이다.
 
독서는 나에게 날개도 주고 물갈퀴도 주고 호랑이 주먹도 준다. 
즉, 책은 나를 자유롭게 하며 땅과 하늘을 점점 넓혀 준다. 
 
아직은 깊고 넓게 많이 읽지는 못하지만, 이것이 내가 “어찌됐건 계속 읽는” 이유다.
 
독서 토론이 매우 좋았던 날. 뇌가 말랑말랑해진 상태에서 쓴 오늘 일기 끝.
 
 
Posted by 태인배

Posted by 태인배